나의 회고

1978학년도 제2학년 경복 방통인의 헌장 제정 회고 (문학박사 허만길)

별다홍 2016. 6. 26. 17:24

<1978학년도 제2학년 경복 방통인의 헌장> 제정 회고

 

                                                                                                                    허만길

                                                                              (전 경복고등학교 교사. 문학박사)  

 

  방송통신고교 학생들은 내가 작사하여 1978년 6월 서울 지구 동문회 주최 제1회 웅변대회에서 선포된 <방송통신고등학교 교가> (일명 방송 통신 고교생노래)를 몹시 사랑했다. 갈등과 불안과 좌절과 어둠이 스칠 때면 이 노래는 자신들의 힘이 되고 용기가 되고 희망이 된다고들 했다. 그리고 이 노래 보급 이후 학생들은 스스로를 가다듬어야겠다는 각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경향이 늘었다.

 

  이렇게 학생들의 자각 의식이 높아질 때, 나는 경복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학생들이 언제, 어디서나 큰 포부를 가지고 뜻을 기르며 생활하는 데 거울이 될 수 있는 글귀를 지니고 다니게 하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방송통신고등학교 교가와 함께 쌍을 이루어 학생들에게 좋은 벗이 되리라 생각했다

 

  이래서 1978년 115일에는 전교 각 학급 학생 임원들이 모여 임원회를 열도록 지도했다. 이 모임에서 임원들은 2학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경복 방통인의 헌장을 만들 것을 합의했다. 임원들은 헌장에 넣고 싶은 자료들을 모으기로 했다. 자료들이 모이면 나와 2학년 임원들은 경복 방통인의 헌장을 초안하여, 전체 임원들의 협의를 거쳐 전체 재학생들의 이름으로 헌장을 선언하기로 했다

 

  이로부터 두 달이 되던 197924일에 방송통신고교 제3회 졸업식이 있었다. 2학년 대표 이정형 군의 송사는 방송통신고교 학생들의 끈끈한 삶의 모습이 그대로 잘 드러나 있었다.

 

  “갖가지 어려움과 억누를 길 없는 향학열이라는 두 극단을 몸부림하면서 기어이 졸업의 영광을 이루신 형님들은 장하고도 장한 굳센 3년을 걸어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저희 후배들은 더욱 감격스럽고 더욱 뜨거운 마음으로 형님들을 우러러보며 축하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들이 편안히 공부할 때 가족의 생계와 자신의 학비를 벌기 위해 땀흘려 일하고, 남들이 고요히 잠잘 때 비로소 피로함을 달래며 글줄 하나하나에 포부를 쏟아야만 했던 형님들이었습니 다.”

  “비록 한 달에 두세 번씩 만나며 선후배의 우애를 다져 주신 형님들이시지마는, 우리들은 이미 남다른 학업 환경을 가진 형과 아우들이었기에 가까이서나 멀리서나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용기를 북돋울 수 있는 따뜻한 가족이었습니다. 무척도 피곤한 일요일, 우리는 머리도 깎지 못한 채 목욕도 하지 못한 채 등교를 했습니다. 괘종시계를 원망하며 졸리는 눈을 비비고는 일어나 책을 읽고 방송을 청취했습니다.”

  “야릇한 조명과 광란하는 음악 속에 해괴한 춤을 추는 젊은이들이 있긴 해도 형님들은 열심히 등교하셨습니다. 형님들은 이런 값진 공부를 결코 예사로 팽개치지 않으실 것이며, 사회의 귀감이 되시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시리라 믿습니다.

  형님들이시여, 저희 후배들도 때로는 입술을 깨물며 때로는 웃으며, 형님들의 뒤를 늠름하게 걷겠습니다. 자랑스럽게 따르겠습니다.”

 

  졸업식 날을 고비로 헌장에 들어갈 기초 자료는 거의 다 수집되었다. 나와 2학년 임원들은 구체적인 문장 작성 작업을 했다. 헌장 펼침식은 218일로 정했다. 지난 115일 학생회 임원회에서 헌장 제정 결의를 할 때, 헌장 펼침식 날에는 학생 문집도 나누어 가지고, 헌장 펼침식 기념 경복 방통 학예능 잔치를 열어 보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문집 발간은 예산이 없어 일찌감치 미련을 두지 말아야 했다. 학예능 잔치는 학생 연구 발표, 웅변, 음악 연주, 연극 발표, 미술전, 시화전, 체육 특기 발표, 서예 전시, 공예 전시, 사진 전시 등 상당히 구체적인 구상까지 세웠다. 그러나 학교의 예산 지원에도 어려움이 있고, 정치적 시국에 따라 학생들의 교내 모임은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삼가도록 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공개적인 헌장 펼침식조차 승낙되지 않았다.

  이 사실조차 학생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나로서는 혼자 애타기만 했다. 그래서 헌장 펼침식은 내가 담당하는 2학년 작문시간을 활용하기로 했다. 2학년 시간표를 조정하여 2학년만이 한자리에 모여 헌장 펼침식을 여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1979년 216일에는 경복 방통인의 헌장을 인쇄하였다. 드디어 1979년 218일 셋째 시간에 2학년 학생들은 나의 담임학급 2학년 1반 교실에 빽빽이 들어섰다. 헌장 펼침식은 국민 의례, 지도 말씀, 헌장 제정 취지 낭독, 헌장 펼침, '방송통신고등학교 교가' (‘방송 통신 고교생노래) 제창, 헌장 펼침과 나의 각오 발표 및 글짓기의 차례로 진행되었다

   

  나는 지도하는 말로서 헌장 제정 배경과 과정을 설명하고, 이 헌장의 내용을 방통인으로서 재학 중에나 졸업 후에나 정신적 지주로 삼으면서 열심히 살아가자고 했다.

  이어 조노현 군이 유인물로 나누어 준 경복 방통인의 헌장 취지를 또박또박 읽었다.

 

 

 

1978학년도 제2학년 경복 방통인의 헌장 제정 취지

 

  1978학년도 경복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제2학년 재학생들은, 우리 자신의 오늘과 내일의 마음과 행동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하나의 뚜렷한 보람을 마련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되리라 여겨, 허만길 선생님 지도 국어 수업 및 작문 수업 시간에 짬짬이 생각을 모아, ‘1978학년도 제2학년 경복 방통인의 헌장을 제정하기에 이르렀으니, 우리는 모름지기 이를 거울삼아 뜻깊은 자아로 가꾸어 나가자.


1979218

                           지도교사 허만길                           

1978학년도 경복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제2학년 재학생

 

  헌장 제정 취지 낭독에 이어, 2학년 전체 학생이 경복 방통인의 헌장을 채택하기 위해 성문환 군이 경복 방통인의 헌장을 낭독했다.

 

 

1978학년도 제2학년 경복 방통인의 헌장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보다 뚜렷이 알고, 삶을 보다 값지게 걷는 길을 터득하면서, 굳고 바르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슬기와 용기와 실력을 닦고자, 북악의 아늑한 기슭 경복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땀과 정열과 의지로 모인 자랑스러운 얼굴들이다. 이에 우리는 이 알뜰한 포부를 크게 꽃피워 무한히 영광스러운 열매를 맺으려는 기약을 하는 바이다.


1. 우리는 출석 수업과 방송 수업에 성실히 참여하며, 예습과 복습을 충분히 하는 학습 태도를  발휘한다.

2. 우리는 개인 생활이나 학교 생활에 있어 자율적, 능동적으로 행동하며, 품위 있는 인간 관 계,  예절 바른 언행, 교칙 준수에 최선을 다한다.

3. 우리는 어려움이나 슬픔이나 외로움 앞에 결코 실망하지 않으며, 어떤 역경도 여유 있게 극복하고 활용할 줄 아는 슬기를 기른다.

4. 우리는 풍족하거나 지위가 높을 때 남을 업신여기거나 편애하지 않으며, 따뜻하고 너그 러운 마음으로 남을 두루 사랑하여 그들이 장점과 능력 발휘에 힘을 다하도록 돌봐 준다.

5. 우리는 가정이나 직장 생활에 있어 책임 있고 유능한 구성원이어야 하며, 자신의 헌신적 노력은 구성체나 구성원의 행복과 발전에 귀중한 열쇠가 됨을 깨달으면서 행한다.

6. 우리는 학력과 덕행과 체력과 소질을 최대로 키우면서, 인류와 역사를 창의성 있게 이끌 어가는 인생을 실천한다.

7. 우리는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꾸준히 탐구하며, 그 삶의 방향으로 정성껏 성실히 살아간다.

                                                       

1979218

1978학년도 경복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제2학년 재학생

 

 

  헌장 낭독이 끝나자, 참석자들은 힘차게 손뼉을 쳤다. 학생들은 이 헌장을 모두 각자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모자람이 없는 것 같았다. 학생들은 이 헌장 속에 자신이 장차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 때에라도, 그 날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결심이 담겨 있는 것을 의미 깊게 생각했다.

  이 헌장은 비록 경복 방통인 제2학년 학생들의 이름으로 선포되었지만, 1학년, 3학년 학생들에게도 다 배포되었는지라, 사실상 전교생이 이 헌장을 감격스럽게 간직하려는 모습이었다. 경복 방통인들에 의해 이 헌장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경복고 부설 방송통신고교 졸업생은 물론 서울 시내 다른 방송통신고교 학생들에게도 곧 알려져 그들도 이 헌장의 내용을 음미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