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작 시

(허만길 시) 사랑과 희생 가득 어머니(월간 한국국보문학 2023년 4월호)

별다홍 2023. 4. 9. 14:52

[월간 한국국보문학 2023년 4월호] (도서출판 국보, 서울)

사랑과 희생 가득 어머니

 

               시인/문학박사 허만길

내 어머니 노갑선(盧甲先) 님

눈 감고 어머니 생각하면

온 세상이 어머니 사랑으로 환하다.

 

내 어머니 노갑선 님

양력 1908년 9월 14일

경남 의령군 의령읍 만천리 상촌마을에서

태어나셨다.

1998년 7월 31일 90살에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아들 허만길 집에서 이승을 떠나셨다.

 

현대식 학교 교육은 받지 못하셨지만

의령군 향장(좌수)을 지내신

조부 노정훈(盧正勳) 선생의 맏손녀,

이름난 한학자 노준용(盧準容.

족보이름 노형용 盧馨容) 선생의 맏딸로서

가정교육을 통해 글공부를 상당히 하셨다.

 

성품이 인자하시고 인내심 강하시고

총명하시고 기억력이 특출하셨다.

어려운 살림에 때로는 품팔이를 하시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기를 좋아하시고

늘 책을 가까이 하셨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콩쥐팥쥐전,

옥단춘전, 숙영낭자전

많은 고대소설을 줄줄이 외우셨다.

 

남편과 자식과 가문을 위해 희생적이셨다.

나의 할머니 최성경(崔成慶) 님이

어머니 나이 56살 1964년 2월 13일에

세상 뜨신 1년 3개월 뒤 1965년 5월 25일

슬하에 돌보아 드릴 자식 없는

나의 큰어머니(백모), 어머니에게는 맏동서가

돌아가실 때까지 병구완을 하셨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의 큰집(백부모 댁)에 모신

나의 할머니 빈소에 아침저녁으로

상식 올리시고

나의 큰어머니 빈소에도 1년간

아침저녁 상식 올리셨다.

 

어머니 나이 60살 1968년 12월 21일

일제의 한국 강점기에 한국과 일본에서

항일 애국 활동을 하신 나의 아버지

허찬도(許贊道. 처음이름 허기룡 許己龍)

선생도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병환으로 누워 계시는

나의 큰아버지(백부)가

1978년 5월 20일 별세하실 때까지

작은딸과 외손녀와

시동생 내외의 도움 받으며

큰아버지를 보살펴드렸다.

큰어머니 돌아가신 뒤로 13년간 보살펴드렸다.

하루 세 끼 식사도 갖다 드리고

방 따뜻하도록 부엌 불도 지피셨다.

 

우리 가족이 진주에서 셋방살이하면서

나와 나의 여동생이 공부하는 동안

고향 의령군 칠곡면에서

버스를 타기 전이나

진주에서 버스를 내리셔서는

등에는 일찍 엄마 여읜 외손녀를 업고

머리에는 보따리를 이고

양손에는 물건을 들고 다니셨다.

어머니, 내 어머니

얼마나 삶이 무거우셨을까.

무거워도 무거움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온갖 어려운 세월 사랑과 희생으로 사셨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충치로

고생하셨다.

28살 1936년에는 잇몸에

노고초(할미꽃) 뿌리 찜질을 하시고서는

부작용으로 1년 동안

입도 벌리지 못하신 채 고생하셨다.

 

17년쯤 뒤 내가 초등학교 시절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충치에 허물 벗은 가재를 구워

가루로 담배를 피우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말 들은 것만으로도

기쁨이 벅찼다.

어머니 충치 고통 덜어 드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랴

꼭꼭 마음에 담아 온 나는

그 말 들은 것만으로도 기쁨에 벅찼다.

 

손에 든 책 보따리를

재빨리 마루에 던졌다.

어머니가 점심 먹으라 하시는

재촉도 아랑곳없이

부랴부랴 냇물로 달렸다.

헐떡이는 숨으로 물속의 돌 하나를 들었다.

정말 꿈처럼 정말 놀랍게도

그 첫 돌을 드는 순간 허물 벗은 가재가

헤엄쳐 솟는 것이 아닌가.

곧장 부엌에서 가재를 굽고

할머니의 담뱃대를 빌렸다.

어머니가 한 모금

가재 연기를 빨아 당기셨다.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었다.

한 모금 담배연기를

입 안 가득 채우시자마자

어머니는 약 스무 해 동안 앓으셨던

충치 아픔에서

말끔히 깨어나시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시겠다며

신기하고 신기하게 여기셨다.

 

나는 그 말을 말해 준 사람이 고맙고

가재가 고맙고

온 세상이 고맙고 어머니가 고마우셨다.

일가친척들이 신통하게 여겼다.

온 동네 사람들이 신통하게 여겼다.

어머니는 이 일을 평생토록 잊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결혼한 두 딸을

일찍 세상 떠나보내시고

큰 슬픔의 고통을 안고 지내셨다.

나보다 10살 위인 누나는

26살 1960년 2월 27일

2살 채 안 된 큰딸과

생후 반년 안 된 작은딸을 두고

세상 떠났으니

부모님을 비롯한 우리 가족의 슬픔은

세상이 캄캄했다.

나보다 3살 아래인 여동생은

친정 식구들의 온갖 노력과 기도에도

39살 1985년 5월 26일

한창 자랄 나이 9살, 16살, 17살

세 아들을 두고 세상 떠났으니

또 다시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가족의 슬픔은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1967년부터 서울에서 살림하는 동안

어머니는 고향과 서울을

왔다 갔다 하시다가

86살 1994년 10월 26일부터는

늘 서울에 계시다가

90살 1998년 7월 31일

좋은 하늘나라 오르셨다.

현모양처로 마음씨 곱고 고우시고

사랑과 희생 가득하신

내 어머니의 이 세상 일생

아무리 기리고 기리어도 모자람이 없도다.

 

어머니는 처녀 시절

무명실 만들기 위해 물레를 돌리시거나

삼베 올 만들기 위해

삼을 삼을 때 부르시던 민요를

가끔 읊조리셨다.

어머니의 민요 가락은

별빛에서 별빛으로 흐르는 빛 무늬처럼

은은하고 은근하고 고왔다.

 

어머니 71살 1980년 1월 어느 날

어머니가 부르시는 민요 가락이

예사로 들리지 않아

나는 내 아들더러 할머니가 부르시는

민요를 글로 받아써 보라 했다.

‘강남땅 강대추’, ‘상추 씻는 저 처녀야’,

‘쌍금쌍금 쌍가락지’, ‘황금 같은 꾀꼬리’,

‘바람아 부실란가’, ‘물레야 뺑뺑 돌아라’,

‘나물 캐러 감세’, ‘형아 형아 사촌형아’,

‘딸아, 좋은 소문 들리게’ 민요 10편을

나의 시집 ‘당신이 비칩니다’(2000년) 부록에

‘어머니의 민요 추억’이라는

큰제목 아래 실었다.

 

고마우신 어머니

보고 싶은 어머니

사랑과 희생 가득하신 내 어머니

어머니 그리울 적마다

어머니의 민요 가락 보배처럼 떠오른다.

■ 허만길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 석사. 홍익대학교 문학박사. 시인. 소설가. 복합문학 창시(1971년). 수필가. 교육자. (2023년)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한글학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국보문학 편집고문. ▲수상: 황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표창. 한글학회이사장 표창. 순수문학 작가상. 문예춘추 청백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