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보문학 2025년 12월호 104~117쪽(발행 도서출판 국보, 서울. 2025. 12. 1)
[초대 평론]
조선전기 허원보와 이황과 곽재우의 관계
문학박사/문학평론가 허만길
고려 후기 공민왕 때 충신으로서 경남 고성(칠성)에 있는 죽도로 유배된 허기(許麒)의 증손자 허원보(許元輔)가 혼인 후 새살림을 의령현(경남 의령군) 가례(嘉禮)에서 꾸렸는데, 이것이 김해 허씨가 의령현에 살게 된 계기이다. 1480년 전후로 추정된다.
유학자이며 시인이며 교육자인 허원보는 의령에서 그 시대의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과 친교하였다. 그의 한 손녀는 퇴계 이황(李滉)의 부인이 되고, 또 다른 손녀는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후처가 되어 곽재우(郭再祐)를 세 살 적부터 길러 의병장으로 만들고 의병 곽재지(郭再祉), 곽재기(郭再褀)를 낳았다. 허만길 문학박사(시인. 복합문학 창시자. 전 문교부 편수관)는 이런 점에 유의하여 허원보와 이황과 곽재우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 허원보의 인품과 학문과 친교 활동
김해 허씨 족보에 허원보는 자는 몽득(夢得), 호는 예촌(禮村)이며, 26살에 사마시(소과)에 합격하였으며, 성품이 온후하고 효와 우애에 힘썼다고 되어 있다. 족보와 그의 묘비문(묘갈명)에는 일찍이 가례(嘉禮. 현재 경남 의령군 가례면)의 흰 바위(백암白巖)와 산수를 사랑하여 백암정(白巖亭) 정자를 짓고 당시의 유명 정치인이며 유학자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 우랑(佑郞) 김영(金瑛)과 함께 시를 주고받았다고 했다.
김해 허씨 문중에 전해 오는 바로는 현재의 의령군 가례(嘉禮)의 명칭은 허원보가 그곳에 살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하며, 그 뜻은 ‘예를 아름답게 밝힌다’이다. 그리고 허원보의 호는 예촌(禮村)인데 이는 가례(嘉禮)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전해 온다. 이는 신빙성이 높다. 호(號)는 살았을 때 사회활동을 하면서 허물없이 쓰기 위해 본명이나 자(字) 이외에 쓰는 이름을 뜻한다. 자(字)는 주로 관례(성인 의식)를 올린 뒤 쓰던 이름이다.
<김해 허씨 세보> 권1(55쪽〜56쪽. 1936년)에는 조선 후기 의금부도사 척암(拓菴) 김도화(金都和. 1825~1912년)가 ‘생원 예촌공 비명’(生員禮村公碑銘)이라는 제목으로 쓴 허원보의 묘갈명(묘비문)이 실려 있다.
김도화는 가승(家乘. 직계 조상의 일을 기록한 책)을 살펴보면, 퇴도(退陶. 이황의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였음.) 이황이 일찍이 묘갈명을 썼지만, 묘비가 갈라져(碣泐) 글이 전하지 않음이 불행이라 하고서, 허원보는 “천성이 순후(淳厚)하고, 효와 우애가 하늘에 드러나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고, 형제들에게 우애가 지극하고, 인간관계에서 틈이 없고, 문장을 일찍 성취하였다.”(資性淳厚 孝友出天 事親也盡其誠 處昆季極其愛 人無間然 文詞夙就)라고 했다. “자신을 단속함에 있어 엄정하고, 남을 대함에 있어 온화하면서 정중하고, 자식들에게 반드시 덕성과 신의로 가르쳤다.”(其律身也嚴而正 其接人也和而莊 敎諸子必以義方)고 했다. 또 “일찍이 ‘가례’(嘉禮)의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작은 집을 지어놓고 ‘白巖’(백암)이라 현판을 걸고, 낚시질로 스스로 즐기고, 시를 읊어 풍류로 삼으면서, 세상의 명예와 이익과 어수선함과 화려함을 멀리했다.”(嘗酷愛嘉禮山水規置小屋而扁之曰白巖漁釣爲自娛嘯詠爲風流世之聲利紛華皆窅如也)라고 했다.
김도화는 허원보가 한훤(寒暄. 한훤당) 김굉필(金宏弼)과 더불어 대니산(戴尼山.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의 산)에서 도를 설명하고 문장을 논하고(講道論文), 한겨울 추위에 젊은이 62명과 모임을 가진 글이 없어진 것이 아깝다고 했다. 허원보가 살아온 자취의 아름다움(事行之懿)과 왕성한 학문 활동(師友問學之盛)이 세상에 많이 전해 왔으나, 전란(임진왜란)의 화재(병선兵燹)로 대부분 잿더미로 변하고 조금밖에 남지 않음이 몹시 아쉽다고 했다.
허원보가 직접 지은 가례 ‘백암’(白巖) 정자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가깝게 지냈던 사람으로는 족보와 묘갈명에서 공통적으로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 우랑(佑郞. *묘갈명에는 좌랑佐郞으로 되어 있음. ‘우랑’, ‘좌랑’은 벼슬이름) 김영(金瑛)으로 나타나 있다. 묘갈명에는 한훤(한훤당) 김굉필과의 도의적 사귐은 황금처럼 단단했다(寒喧道義之契 金如斷而足徵)고 했다.
탁영 김일손(1464년, 세조 10년∼1498년, 연산군 4년)은 1486년(성종 17년) 식년 문과(3년마다 치르는 과거)에 2등으로 급제하였고, 홍문관 교리, 사간원 헌납, 이조 정랑(정5품) 등을 지내고 무오사화 때 사형당했으며, 중종반정으로 관직이 회복되었다. 한훤당 김굉필(1454년, 단종 2년∼1504년, 연산군 10년)은 1494년 유일지사(遺逸之士. 학행이 뛰어난 선비)로 천거받아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정6품)을 지냈고, 무오사화 때 평안도 희천에 2년간 유배되었다. 창계 문경동(1457년, 세조 3년~1521년, 중종 16년)은 1495년 증광 문과(나라의 경사 때 치르는 과거)에 급제하고, 춘추관 편수관, 성균관 사성, 청풍 군수(종4품)를 지냈다. 문경동은 허원보의 친구이기도 하지만, 허원보의 둘째아들 허찬(許瓚)의 장인이고, 퇴계 이황의 처외조부이다.
가례를 몹시 사랑하고 예(禮)와 학문과 시(詩)를 중시한 허원보는 제자들을 기르면서, 가례의 ‘백암’(흰바위)을 사랑하여 그 옆에 ‘백암’ 정자(백암정白巖亭)를 직접 짓고, 그 시대의 유명한 사람들과 굽이진 물에 술잔을 띄우며 시를 짓는 유상곡수(流觴曲水)의 풍류를 즐겼는데, 그때의 시도 한 수 남아 있다. 이 유상곡수 터는 이황이 허원보의 손녀의 남편으로 장가들어 그의 장모와 아내가 술잔을 띄워 보내면 이황이 그 술을 마시는 낭만의 자리가 되기도 했다.
▲ 허원보의 자녀와 인척 관계
허원보는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 부인 해주 오(吳)씨의 아버지는 호군(護軍. 정4품)을 지낸 오한(吳漢)이다. 호군은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五衛)에 속한 벼슬이다. 허원보 부부의 묘는 의령읍 무동(무전)에 합분이고, 재실 이름은 고망재(高望齎)이다. 허원보의 묘갈명(묘비문)은 처음 퇴계 이황이 지었으나, 묘비가 갈라져 조선 후기 의금부도사 척암(拓菴) 김도화(金都和. 1825~1912년)가 새로 지었다.
허원보의 장남 허수(許琇. 1478년, 성종 9년〜1539년, 중종 34년)는 한양(서울)에서 선릉(宣陵. 조선 성종의 능) 참봉(參奉) 등의 벼슬을 지내고,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가례 서쪽 현재의 의령군 칠곡면 수부 마을, 압수 마을, 도산 마을 지역과 연고를 맺었다. 그의 무덤은 칠곡면 압수 마을 뒷산에 있고, 그의 재실 존저암((存箸庵)은 칠곡면 도산 마을 서쪽 산중턱에 있다. 그의 부인은 감사(관찰사. 현재 도지사에 해당)를 지낸 윤수천(尹壽泉)의 딸이다.
허수는 퇴계 이황의 처백부가 된다. 현재 전하는 허수의 묘갈명은 퇴계의 10세 종손 성리학자 고계(古溪) 이휘녕(李彙寧. 1788〜1861년)이 지었고, ‘도산’(陶山) 마을 이름은 퇴계의 연고지 경상도 예안현(현재 경북 안동시) ‘도산’(陶山)에서 따온 것이다. 허수의 장남 허안세(許安世)는 중훈대부(종3품) 예빈시(禮賓寺. ‘예빈사’라 읽지 않음) 참봉, 차남 허안정(許安鼎)은 군자감정(軍資監正. 정3품. 군자감은 군수품 기관)을 지냈으며, 이들의 무덤도 의령군 칠곡면에 있다. 그래서 칠곡면 수부, 압수, 도산 마을은 허씨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 되었다.
허원보의 장남 허수가 서울에서 지낸 까닭으로 허원보의 가문과 많은 재산은 주로 둘째아들 진사 허찬(許瓚. 1481~1535년)이 관리하였는데, 그는 창계 문경동의 맏사위이다. 허원보의 친구이기도 한 문경동(1457~1521년)은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 편수관, 성균관 사성, 청풍 군수(종4품)를 지냈다. 허찬의 장남 허사렴(許士廉)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며, 퇴계의 처남으로서 퇴계의 요청에 따라 청량산(경북 봉화군) 절에서 함께 독서했다. 허사렴은 퇴계와 퇴계의 제자에 대해 기록해 둔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 제자 309명)에 올려 있다. 허찬의 차남 허윤렴(許允廉)은 역사책에서 처음이름 허사언(許士彦)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진주 목사(牧使. 정3품)를 지냈다. 허찬의 맏사위가 퇴계(退溪) 이황(李榥. 1501~1570년)이고, 퇴계는 허찬의 묘갈명을 지었다. 둘째사위가 충의위(忠儀衛. 공신 자손으로 구성된 중앙군)를 거친 김진(金震)이다. 허사렴의 맏사위 오운(吳澐. 1540∼1617년. 본관 고창. 함안 출생)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제자이며 문과 급제 후 충주 목사, 광주 목사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경남 백령(白嶺)에서 2만여 명의 의병을 모아 곽재우 장군과 함께 싸운 의병장령이다. 정유재란 때도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에 오르고 경주 부윤(종2품), 공조참의를 지냈다. 허사렴의 둘째사위 박녹(朴漉. 1542∼1632년. 본관 반남潘南. 나주의 옛이름)은 경북 영주 사람으로서 임진왜란 때 고향 사람들의 추천으로 의병장이 되어 다른 지역 의병장들과 협력하여 전공을 세우고, 태릉(조선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능) 참봉,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허원보의 셋째아들 허경(許瓊)은 참봉을 지냈으며, 딸 셋을 두었는데, 맏딸은 황해도 관찰사(감사)를 지낸 곽월(郭越. 1518∼1586년. 곽재우 아버지)의 후처가 되어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년)를 3살 때부터 길렀으며, 직접 낳은 곽재지(郭再祉), 곽재기(郭再褀)도 눈부신 의병 활동을 하였다. 곽월과 이황은 사촌동서 간이다. 허씨 부인은 곽월보다 11년쯤 뒤에 죽었다. 곽재우는 정유재란 때 1597년 8월 29일 창녕 화왕산성에서 계모 허씨가 죽자 상여를 모시고 산성을 나와 장례를 마친 후 울진으로 가서 3년상을 치렀다. 허경의 둘째사위 박옥형(朴玉衡)은 군수였고, 셋째사위 이경춘(李景春)은 생원이었다.
허원보의 넷째아들 허연(許璉)과 다섯째아들 허관(許瓘)은 생원이었고, 여섯째아들 허환(許環)은 습독(習讀. 훈련원 무관직)이었다. 허관의 아들 허안인(許安仁)은 죽은 뒤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형조참판(현재 법무부 차관에 해당)의 벼슬을 받았다. 허안인의 외아들로서 무과에 급제한 허언심(許彦深. 1542~1603년)은 곽재우의 매부(누나 남편)이며 곽재우의 가족을 돌보면서 싸운 의병 장령이다. 그는 가례에 살면서 진주에도 재산이 많았는데, 임진왜란 때 군량 수천 석을 내놓았고, 의병의 의식주와 전투 자금 마련에 힘을 썼다. 임진왜란 후 가선대부(문관 종2품)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곽재우의 아버지 곽월은 임진왜란 6년 전에 죽었으므로, 곽재우의 의병 활동에는 자신을 길러 준 계모 허씨 부인(허원보의 손녀), 허씨 부인이 낳은 아들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곽재지와 곽재기, 그의 매부 허언심을 비롯한 허씨 가문이 큰 버팀목이 되었다. 여기에 허원보의 증손녀의 남편 의병 장령 오운도 큰 힘이었다.
허원보 맏딸의 남편 박양(朴良)은 선전(宣傳. 선정관청의 무관)을 지냈다. 둘째딸의 남편 박운(朴芸. 본관 밀양. 호 수성제修誠齊)은 호조정랑(정5품)을 지내고 이조참판(종2품)을 추증받은 졸당(拙堂) 박총(朴聰)의 증손자로서 삼가현 송지촌(현재 합천군 대병면)에서 살다가 처가가 있는 의령현 가례로 와서 수성(修誠)에서 살았으며. 병마우후(兵馬虞侯),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 종2품)를 지냈다. 그는 퇴계의 처고모부이고, 퇴계와 가까이 지냈다. 박운의 장례 때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보낸 ‘만박우후’(輓朴虞候)라는 제목의 만사(輓詞)가 전한다.
▲ 허원보, 이황, 곽재우의 관계
허원보는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년)의 부인 허씨(허찬許瓚 큰딸)는 허원보의 손녀이다.
곽재우(1552~1617년) 장군의 계모(곽월 후처)로서 곽재우 장군을 세 살 때부터 기르고, 곽재우 장군과 함께 눈부시게 의병 활동을 한 곽재지(郭再祉), 곽재기(郭再褀)를 낳은 허씨 부인(허경許瓊 큰딸)은 허원보의 손녀이다. 곽재우 장군의 아버지 곽월(郭越. 1518~1586년. 황해도 관찰사. 도지사에 해당)이 허원보의 손녀의 남편인 것이다. 이황과 곽월은 4촌 동서간이 된다.
곽재우 장군 지휘 아래 있던 17장령(장수) 중 허언심(許彦深)은 허원보의 증손자(허안인(許安仁 아들)이며 곽재우의 매부인데, 허언심의 묘갈명에 곽재우는 허언심의 부제(婦弟. 부인의 남동생)라 했다. 허원보는 곽재우 장군의 계모로 보아 곽재우의 외증조부이자, 곽재우 장군 누나의 시증조부이다. 17장령 중 오운(吳澐)은 허원보의 증손녀(허사렴許士廉 큰딸)의 남편이다. 이렇게 허원보의 후손들은 곽재우 장군의 의병 활동에 주요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이황과 곽월이 허원보의 손녀의 남편이 된 것은 허원보 사후의 일이다. 이런 점들로 보아, 허원보의 삶과 인품과 학문적, 사회적 지위를 짐작할 수 있으며, 사후에도 그의 존재감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 퇴계 이황과 허씨 부인의 혼인 생활
경상도 예안현 온계(현재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자란 퇴계 이황(1501~1570년)은 같은 나이 허씨 부인과 1521년(만 20살)에 혼인했다. 처조부 허원보가 죽은 뒤 13년쯤이다. 허씨 부인의 아버지 허찬은 딸만 둘을 둔 문경동의 맏사위였으므로, 허찬 가족은 문경동이 살고 있는 경상도 영천군(현재 경북 영주시) 초곡(草谷. 푸실)을 오갔다. 퇴계는 혼례를 초곡에서 치렀다.
허씨 부인은 혼인 후 퇴계와 함께 친정 가례와 외가 초곡을 오갔다.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퇴계는 가난하게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으며, 허씨 부인은 예안에서 가까운 외가 초곡에서 어린 맏아들(이준李寯)을 옆에 두고 둘째아들(이채李寀)을 낳은 지 한 달 만에 1527년 11월(만 26살)에 죽었다. 무덤은 경북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있다. 퇴계는 1530년 권씨 부인과 재혼하고, 1534년 문과에 급제했다. 권씨 부인은 자식 없이 1546년(퇴계 만 45살)에 죽었다. 퇴계는 재혼 후에도 의령군 가례에 자주 들렀고, 시(詩)도 남겼다. 둘째아들 이채는 외가 가례에서 자랐는데, 정혼 뒤 21살에 죽고 무덤은 의령읍 무전 허찬 부부 무덤 가까이 있다.
▲ 백암정 복원 과정
조선전기 유학자이며 시인이며 교육자인 예촌(禮村) 허원보는 경남 고성에서 살다가 신혼 살림을 의령현(의령군) 가례(嘉禮)에 꾸리고서, 백암(白巖. 흰바위)과 산수를 사랑하여 정자를 지어 ‘白巖’(백암))이라 첫 현판을 걸었다.
백암(白巖. 흰바위) 바위는 백암정 앞에 있으며, 그 유래는 <의령군지>(2003년)에도 나타나 있다. 허원보는 백암정에서 유명 정치인이며 학자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 좌랑(佐郞) 김영(金瑛) 등과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으며, 뒷날 허원보의 손녀의 남편 퇴계 이황(李滉)도 이 백암정에 올라 시를 읊었다.
백암정(白巖亭)은 세월과 비바람으로 넘어지고 파손되면, 김해 허씨(許氏) 문중과 가례 주민들이 고치기와 다시 짓기를 거듭했는데, 근래에는 2003년 9월 태풍 매미로 말미암아 크게 파손되어 넘어졌다.
그런데 의령 사람들은 파손되어 넘어져 있는 이 백암정의 유래와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허원보의 후손인 허만길 문학박사는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의령신문>에 ‘백암정의 유래와 가치’를 비롯해 김해 허씨의 의령 정착 과정, 가례의 지명 형성 과정 등의 논문을 6차례 발표하면서 백암정의 복원을 주장했다. 의령문화원 발행 <의령문화> 제23호(2014년)와 <재경 의령군향우회60년사>2015년)에 실은 허만길의 논문에서도 백암정 복원을 주장했다.
드디어 고맙게도 의령군에서 2019년 10월 백암정을 붕괴 전 모습으로 복원하고, 백암정 탐방로도 조성하는 공사를 했다. 의령군에서는 문화적 가치가 높은 백암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2019년 6월 백암정을 군 소유로 등기했다.
그리고 2014년 12월 의령신문사 박해헌 발행인과 재경 의령군향우회 강완석 회장이 의령박물관에서 백암정(白巖亭) 현판과 기문(記文) 현판을 찾아, 백암정은 가례 지역 임인생(壬寅生) 24명이 동갑계를 만들어 1958년에 기와를 올리고 1959년에 중건 완공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강완석 회장은 중학생 시절에 그의 아버지 강신의(姜信義)가 백암정 중건에 열정을 쏟던 일과 그가 아버지를 돕던 일을 기억하여 의령문화원 발행 <의령문화> 제24호(2015년)에 ‘백암정 복원 열정을 생각하며’라는 글을 싣기도 했다.
백암정 창건자 예촌(禮村) 허원보(許元輔)의 후손인 허만길 박사는 <의령신문> 2019년 12월 26일 6쪽에 ‘허원보 선생 후손으로서 백암정(白巖亭) 복원을 고마워하며’라는 고마움의 글을 발표했다.
■ 허만길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 석사. 홍익대학교 문학박사(국어국문학). 시인. 소설가. 수필가. 문학평론가. 교육자. 1971년(28살) 복합문학(Complex Literature) 창시 및 1980년 세계 최초 장편복합문학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 발행. 최초 정신대 문제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1990) 발표. 문교부(교육부) 국어과 편수관, 교육부 국제교육진흥원 강사, 학술원 국어연구소 표준어 사정위원, 한국교육과정평가원 해외동포용 ‘한국어’ 교재개발연구위원, 서울대학교 국어교육연구소 ‘국어교육학사전’ 집필위원 역임. 2025년 현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및 복지위원회 위원. 월간 한국국보문학 편집고문. ▲수상: 황조근정훈장(2005), 대통령 표창(1991),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표창(2004. 정신대 문제 제기 및 인권 옹호 공로), 상공부장관 표창(1987. 산업체근무 청소년교육공로), 한글학회이사장 표창(1988), 순수문학 작가상(2014. ‘민족작가’ 칭호), 문예춘추 청백문학상(2011. 맑고 께끗한 시 정신 탁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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