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

(허만길) 개천예술제 추억 ('개천예술제70년사'에서)

별다홍 2023. 1. 13. 17:03

<개천예술제 70년사> 650~652쪽(발행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진주지회, 경남 진주. 2021. 12.)

 

 

낭만과 나라사랑이 빛나는 개천예술제 추억

 

                                                                                                         문학박사•시인 허만길

                                                                                                      (전 문교부 국어과 편수관)

 

나의 개천예술제 만남은 내가 1955년 진주중학교에 입학하여 1961년 3월 진주사범학교(초등학교 교원양성 국립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이다. 의령군 칠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주로 이사하여 진주봉래초등학교 구내 이발소에서 일을 하던 아버지를 도우며 공부하였던 것이다. 그동안 6차례 개천예술제의 설렘을 즐겼는데, 그 설렘의 추억은 현재와 미래에도 생생하게 살아 꿈틀거리는 설렘이다.

개천예술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1주년이 되던 1949년 제1회 영남예술제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1959년 개천예술제로 명칭이 바뀌었다. 개천예술제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과 10.26사태가 있던 1979년에는 개최되지 못했는데, 나는 4차례의 영남예술제 이름과 2차례의 개천예술제 이름과 친구했던 것이다.

 

긴 맥을 이어 오는 동안 개천예술제는 그 구성과 내용에 있어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나의 10대의 나이에 즐겼던 개천예술제는 어떤 의미와 이미지로 내게 남아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많은 것이 그 속에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낭만과 나라사랑이라는 의미와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

개천예술제의 행사는 매우 다채로웠다. 예술제의 시작 행사가 있었고, 가장 행렬, 백일장, 예술 실기대회(음악, 미술, 무용 등), 전시회, 강연회, 연극대회, 웅변대회, 남강 유등, 소싸움대회 등 많은 행사가 있었다. 각종 경연대회는 대체로 학생부와 일반부로 나뉘었다. 주변 행사로서 미국공보원(USIS)이 있던 진주공원 광장의 특설무대에서는 낮에는 가벼운 연극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공연이 있고, 저녁에는 영화가 상영되었다.

내가 중학교 재학 중일 때 영화관으로는 진주극장과 용사회관(진주성 북쪽)이 있었고, 그 뒤에 국보극장과 시공관이 차례로 생겼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하는 경우 외에는 영화관에 출입할 수 없었으므로, 개천예술제 기간에 진주공원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일반 시민은 물론 학생들에게 큰 인기였는데, 빽빽하게 서서 관람했다. 주변행사로서 서커스도 인기가 많았는데, 해마다 장소가 일정하지 않다가 국보극장이 생긴 뒤에는 국보극장 앞 광장에 대형 천막을 쳐 놓고 공연을 했다. 서커스 관람은 학교에서 단속하지 않았으므로 학생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시내 곳곳에서 펼쳐진 종합문화예술축제의 성격을 띤 개천예술제는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고 관람하였는데, 진주시민들을 설레게 하고 들뜨게 했다. 사람들은 예술제 기간 동안 흥겨운 마음으로 공연장과 경연장과 길거리를 누볐다. 사람들은 행사 참가나 관람이나 분위기를 통해 잠재력과 꿈을 키우고 정서적 여유를 누렸다. 이러한 것은 낭만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해 진주극장에서 개최된 웅변대회에서 부산 동아고등학교 학생이 갑자기 원고를 기억하지 못해 청중이 안타까워했는데, 그 학생은 임기응변으로 대담하게 정열적으로 그 국면을 헤쳐 나가 3등으로 입상했다. 젊음의 낭만이 느껴졌다.

 

개천예술제는 그 성격과 분위기에 있어 나라사랑이 빛나고 있었다.

제1회 영남예술제 곧 개천예술제는 정부수립의 실질적인 자주독립 1주년을 기리고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서 개최하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었다. 개천예술제 행사 시기도 음력 개천절 혹은 양력 개천절과 관련되어 있었다. 가장행렬과 남강 유등은 임진왜란 때의 애국심을 되살리는 일이 중심이 되고 있었다. 개천예술제 기간에는 진주 시민은 물론 전국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촉석루와 논개의 영정을 모신 의기사와 논개의 충렬이 서린 의암을 찾았는데, 이 또한 나라사랑을 스스로 일깨우는 일이었다. 누구의 가르침으로 나라사랑의 정신을 기르기보다 여러 경험이나 분위기를 통해 스스로 은연중에 잠재적으로 애국심을 기를 수 있다면, 진정으로 값진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1959년(단기4292년) 진주사범학교 2학년 때와 1960년(단기4293년) 3학년 때 개천예술제에 서예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되었다. 진주여자고등학교 강당에 전시되고 입선장을 받았다. 입선장은 세로글씨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씌어 나갔으며 국한문 혼용이었다. 거기에도 개천예술제가 독립 기념이라는 나라사랑을 명시하고 있었다.

 

입 선 장

1. 부: 미술부

1. 과: 서예

1. 반: 고등부 학교반

소속 진주사범학교

성명 허만길

우자는 독립 기념 제10회 개천예술제의 두서에 입선되었기 본장을 준다.

단기4292년 11월 8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진주지부

위원장 설창수

입 선 장

1. 부: 미술

1. 과: 서예

1. 반: 고등학교반

1. 종목: 실기

소속 진주사범학교

성명 허만길

우자는 독립 기념 제11회 개천예술제의 두서에 입선되었기 본장을 준다.

단기4293년 11월 26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진주시지부

대표최고위원 설창수

상임최고위원 박세제

위 두 입선장을 보면, 개천예술제가 독립 기념으로 개최되었다는 것 외에도 몇 가지 유의할 사항이 있다. 개천예술제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진주시지부가 주최하였음을 알 수 있고, 종목이 어떤 체계로 갖추어졌음도 짐작할 수 있다. 1959년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진주시지부의 대표를 위원장이라고 했다가, 1960년에는 대표최고위원이라고 했음도 알 수 있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는 1961년에 해체되었으므로, 그 뒤로 개천예술제의 주최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진주지부, 개천예술재단, 진주문화예술재단 등으로 변화가 있게 되었다.

나는 개천예술제를 창시하여 자리잡도록 하기까지는 설창수 선생의 노력이 컸음을 기리고 싶다. 1912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난 설창수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경남일보’ 주필로 취임하고,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1949년 개천예술제를 탄생시키고 발전시켰던 것이다. 나는 설창수 선생이 1959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한복을 입고 미국을 방문한 뒤 진주극장에서 귀국보고를 하는 자리에 참석한 바 있는데, 애국심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개천예술제는 2021년 현재 제70회를 맞이했으니, 그 이름에 찬사를 보내면서 끝없는 발전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