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도 선생의 일제 강점기 애국 활동(요약)
허찬도 선생의 일제 강점기 애국 활동 (요약)
허찬도 선생
허찬도(許贊道 1909년 6월 17일〜1968년 12월 21일. 호: 정암貞庵. 본관 김해) 선생의 처음 이름은 허기룡(許己龍)이다. 이름 변경은 옛 호적부에도 나타나 있다.
선생은 일본이 한국을 강제합방하기 1년 전 봉건과 보수성이 강한 가난한 농촌 선비 허종성(許宗成 1891년 6월 2일~1951년 8월 31일. 호: 직재直齋) 선생의 3남 3녀 중 둘째아들로 경상남도 의령군 칠곡면 도산리 252번지에서 태어났다. 의령군 의령읍 만천리 상촌부락에서 태어나 자란 노갑선(盧甲先 1908년 9월 12일〜1998년 7월 31일. 본관 광주) 님과 혼인하였다. 일제의 한국 강점기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애국 항일 활동을 하였다. 평생을 가난한 가운데서도 청렴하고 검소하고 곧고 바르고 의롭게 살았다.
허찬도 선생은 10살 때 경남 의령군 칠곡면에서 3․1독립운동에 참가했다가, 선생의 아버지(허종성許宗成 선생)와 작은아버지(허종수許宗壽 선생)는 주재소로 끌려가고 선생은 경찰에 쫓김을 당하였다.
스무 살(1929년)에 세상 구경을 하기 위해 노동을 하면서 부산으로 가출을 했다가는 고향 칠곡면에서 가장 먼저 상투머리를 깎은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를 못 마땅히 여긴 아버지로부터 화롯불 불벼락을 맞았다.
선생은 우선 배우고 알아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각에서 칠곡소학교 교장을 찾아가 소학교에 야학(밤공부)을 설치해 줄 것을 자청하여 승낙을 받고는 친구들을 모아 1930년 12월 하순(음력 11월)부터 1933년 5월 하순까지 2년 6개월간 야학 과정을 공부하였다.
1933년(24살) 초가을에는 칠곡면 소방조(소방대)에 가입하여 불손수레를 끌며 자원 봉사 형식의 일을 했다. 소방조의 우두머리는 ‘소방조두’(消防組頭)라 했으며, 금테 두른 모자를 쓴 일본인이었다. 허찬도 선생은 책임감과 성실함을 크게 인정받아, 평조원의 반장인 ‘소방소두’(消防小頭)가 되었다.
1936년(27살) 경남 진양군 장재못에 양수기를 설치하여 농민들의 가뭄 걱정을 덜어 주려 했으나, 양수기의 시운전 단계에서 일을 고의적으로 방해하며 폭력을 행사하고 조선인이라며 멸시하는 집현면 주재소 구로다(黑田) 부장을 가격하여 진주구치소에서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40년(31살) 일본 오사카부의 군수물 공장 아사히철공소(朝日鐵工所)에서 고야마(湖山)로 불리며 일하다가, '아사히철공소 조선인화친회(朝鮮人和親會)'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맡고서, 동맹파업으로 공장 가동을 멈추게 하였다. 일본 신문에 보도되고, 한겨울 밤중에 경찰에 체포되어 호송되다가 격투하여 탈출하였다.
허찬도 선생은 ‘야하타제철소 조선인친화회’ 임원들과 은밀히 만나면서 경찰이 더 이상 추적할 수 없다고 판단되자, 1941년 2월 아내와 큰딸을 한국의 고향에서 일본으로 이주시켰다. 가족들은 일본의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오자(大字) 전차 정류소 부근으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석 달 만에 교토부(京都府) 구세이군(久世郡) 오쿠보무라(大久保村) 오자(大字) 오쿠보(大久保) 30번지에 정착했으며, 1943년 3월 21일 아들 허만길이 태어났다.
선생은 아들 허만길이 태어나던 해 1943년(34살) 9월 일본 교토부 오쿠보 비행장에서 노무자 일을 하던 중 강제 징병 당했다. 시가켄(滋賀縣) 훈련소에서 이질을 앓아 치료받으면서, 군의장(군의관 우두머리)에게 일제의 한국 침략의 부당성을 일깨우고, 군의장의 도움으로 5개월 만에 병역 해제증을 받아 귀가하였다. 1944년 7월 가족을 한국의 고향으로 먼저 보내고, 나라가 독립할 때까지 일본 거주 한국인들에게 항일 정신을 북돋우었다.
허찬도 선생은 1968년 2월 13일부터 급성 신장염을 앓아 12월 19일부터 위독하다가 1968년 12월 21일 59살의 나이로 고향 집에서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