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

(문학박사/시인 허만길 수필) 1958년 진주사범학교 입학날

별다홍 2025. 4. 24. 16:50

월간 <한국국보문학> 2025년 6월호 87~98쪽(발행 도서출판 국보, 서울. 2025. 6. 1.)

 

<수필>

1958년 진주사범학교 입학날

 

문학박사/시인 허만길

 

내가 태어난 때는 1943년 이른 봄이다. 음력으로는 2월, 양력으로는 3월이었다.

생일상은 줄곧 음력 날짜로 차렸다. 생일 때면 어머니는 깨끗한 옷차림으로 부엌에서 생일상을 차려놓고 손을 비비며 나직한 목소리로 기도했다. 부엌에서 빌고 나서는 생일상을 방안으로 옮겨 또다시 그렇게 빌었다.

어머니는 내가 곤히 잠들어 있을 때에는 내가 잠에서 깰까 봐 조심조심 조용히 빌었다. 어머니의 비는 말 속에는 언제나 나의 몸이 성하고(건강하게 힘차고) 수명장수하고 소원 성취하기를 바라는 뜻이 가득했다.

1958년의 생일날은 만 15살 되는 날이었다. 그 해 음력 생일날은 양력으로는 4월 초순이었다. 고등학교 입학식 전이었다. 생일날 새벽, 나는 어머니가 벌써 새벽바람을 쐬며 생일상을 차리는 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꿈속에서 고향 집, 고향 농토를 한없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가 소유하고 있던 농토는 두 곳이었다. 한 곳은 경남 의령군 칠곡면 도산리 압수부락 입구 장구지들에 있는 논이었고, 또 한 곳은 도산리 마을 앞 ‘안산’ 밑 냇가에 위치한 논과 그 옆에 하천 땅을 일군 논이었다.

고향 산, 고향 마을, 고향 집, 고향 논이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리고는 장구지들 논이 크게 떠올랐다.

우리 가족이 추위가 채 가시기 전 파란 보리고랑을 호미질하고 있다. 맨 앞에서부터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내가 호미질을 해 가고 있다. 그리고 논 언덕에서 달리기 선수의 차례를 가리듯 여동생이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여름 웅덩이에서 물대질하는 아버지 옆에서 누나, 나, 여동생이 교대로 물대를 눌러 아버지의 힘을 덜어 드린다. 우리 가족은 웅덩이에 다시 물이 고일 때까지 버드나무 그늘에 앉아, 어머니가 나무함지에 이고 온 수제비를 맛있게 먹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산산한 가을볕을 받으며 볏단을 묶는다. 나와 여동생의 학교 회비(수업료)에 보태려고 누나와 내가 나란히 벼이삭을 줍고 있다. 누나의 따스한 얼굴이 나를 바라보며 방긋이 웃는다.

아, 그런데 이게 무엇이람. 그것은 너무나도 우람하고 너무나도 거대하다. 뱀 같기도 하고 당장이라도 승천할 용 같기도 한 것이 장구지 논의 언덕 옆 논바닥에서 늠름히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굵기는 한두 아름에 길기는 육칠십 미터나 되어 사각형 논 둘레 중 두 변을 거의 차지하고 있다. 거무스레한 몸통에 은빛이 찬란하고 눈동자가 영롱하다. 어질고 꿋꿋하고 영웅스럽고 신성스러운 인상이다. 참으로 신령스러운 존재이면서 신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우리 논의 지킴이인가라는 생각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어떤 화신인가라는 생각도 해 본다.

나는 놀라면서도 두렵지는 않게 이 영물을 가까이 하다가 문득 잠에서 깼다. 아쉬움으로 눈을 뜨니, 어머니는 벌써 나의 머리맡에서 생일상을 차려 놓고 손을 비비며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생일날 새벽의 이 꿈은 나에게 무슨 의미를 담아 주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인문고등학교로 진학하여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권유는 나의 가정 형편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결국 의견 많고 관심 많던 나의 고등학교 선택 문제는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고등학교 과정인 진주사범학교 진학으로 결정되었다.

4월 초순(7일)의 바깥 날씨는 제법 화창했다.

진주사범학교의 정문에서 2층 본관 목조 건물로 이르는 넓은 길 양쪽에 늘어선 플라타너스의 어린잎은 너그러움을 닮아 가고 있었다. 2층 건물 앞의 오밀조밀한 늘푸른나무들은 언제나 푸른 꿈을 지니고 싶다는 듯 의연한 몸매로 솟아 있었다.

약 220명의 남녀 신입생들이 본관 서편 끝에서 이어지는 좁은 회랑을 거쳐 강당 마루바닥에 발을 올려놓았다. 상급생들이 중앙의 길을 열어 두고 열띤 박수로 환영했다. 마치 우렁찬 소리를 내며 두 갈래로 갈라지는 파도 사이를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박수 소리가 멈추고 가로질렀던 길도 문을 닫았다. 신입생들은 앞쪽에 서고, 2,3학년 학생들은 신입생의 뒤에서 따스한 기운으로 감싸 주었다.

 

애국가에 이어 학교장의 인사말이 끝맺을 즈음 나는 비로소 바깥보다는 실내의 공기가 봄기운에 덜 익숙하고 있음을 알았다. 맨 앞쪽에 선 나의 발이 시려 왔다. 눈동자를 아래쪽으로 하니, 나의 맨발은 긴장하고 있었다. 왼쪽으로 눈매를 돌려 다른 학생들의 발등을 보았다. 그들은 그런 대로 양말에 감싸여 있었다.

오른쪽으로 눈매를 돌렸다. 나는 놀랐다. 중학교 3년 동안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을 갑작스런 현실로 체험하고 말았다. 팔을 조금만 여유 있게 벌려도 닿고 말 자리에 감색 옷에 하얀 깃, 하얀 양말이 눈부신 여학생들이 수녀처럼 다소곳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발등의 부끄러움보다는 이제껏 전혀 익숙지 못했던 남녀 공학이라는 낯선 처지를 앞으로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가 걱정되었다.

이런 생각에 골몰하고 있을 때 상급생들이 부르는 교가가 나를 경건한 분위기로 되돌려 놓았다. 시인 이병기 작사, 작곡가 이상근 작곡의 교가였다.

 

       교가

  비봉과 두류연봉 서북에 두고

  머나먼 예로부터 이름난 고을

  의랑의 고운 넋은 남강에 젖고

  촉석루 아오라이 솟아 있도다.

  이곳에 이룩하신 우리 학교는

  사범에 사범 되는 진주사범

 

  이 나라 이 사업에 뜻을 세우고

  튼튼한 몸으로써 씩씩한 마음

  우리는 남보다도 더 부지런히

  배우고 가르침을 익혀야 한다.

  영재가 모여드는 우리 학교는

  사범에 사범 되는 진주사범

 

  신성한 조상들의 깨끗한 피를

  몇 천 년 이어오는 조촐한 겨레

  귀여운 아들딸인 젊은 일꾼을

  참으로 지성으로 길러야 한다.

  이 길로 나아가는 우리 학교는

  사범에 사범 되는 진주사범

나는 가사에 나타난 주요 단어들을 음미해 보았다.

‘비봉’은 진주의 명산 ‘비봉산’을 가리키고, ‘두류연봉’은 우리나라 삼신산의 하나인 ‘지리산’을 가리킨다. ‘의랑’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된 후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과의 술자리를 촉석루에서 강물을 두른 바위(의암)로 옮겨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장렬히 몸을 던진 ‘논개’ 열사를 가리킨다.

 

가사의 내용은 충절과 신성의 분위기를 불러일으키고서, 학생들로 하여금 남보다도 더 부지런히 배우고 가르침을 익혀, 장차 스승으로서 겨레의 귀여운 아들딸인 젊은 일꾼을 참으로 지성으로 잘 길러야 함을 다짐하도록 하고 있었다.

후렴에서 강조되는 ‘사범’은 ‘가르치는 스승’, ‘스승이 될 만한 정도의 모범이나 본보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범에 사범 되는 진주사범’은 가르치고 행함에 있어 비할 바 없이 최고 경지의 ‘진주사범학교’임을 명심하게 하고 있었다.

교가를 교훈 ‘슬기롭게’, ‘너그럽게’, ‘올바르게’와 더불어 거울로 삼는다면 학생들에게는 금상첨화가 될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앞으로 3년 동안 스승의 길을 열심히 닦고 개척하고자 이 학교에 들어섰다. 나의 인생이 가야 할 길이 아무리 높고 넓고 멀고 끝없다 할지라도, 스승의 경지를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깨달음과 수양과 성스러움과 빛의 길을 향함에 있어, 이제 나에게는 스승의 길을 닦고 개척한다는 현실적 구체적 디딤길 하나에 서 있는 것이다.

인생의 꽃망울이 겨우 자리잡기 시작하는 열다섯 살의 나이. 내가 만약 초등학교 교사를 길러 내는 사범학교에 들어오지 않고, 일반 인문고등학교에 입학하였더라면, 나는 그 입학식에서 무엇을 골몰하고 무슨 원대한 꿈을 결심하고 있을 것인가.

 

나는 1학년 ‘송반’(松班)에 배정받았다. 출석 번호는 5번이었다. 다섯 번째로 큰 키를 의미했다.

진주사범학교는 전통적으로 학급의 차례를 1반, 2반, 3반, 4반 대신에 ‘송반(松班), 죽반(竹班), 매반(梅班), 난반(蘭班)’으로 이름했다. ‘송,죽,매’ 세 반은 남학생 학급이고, ‘난’ 반은 여학생 학급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1학년 1반에 배정된 것이다. 담임선생님은 화학이 전공인 이장화 선생님이었다.

 

첫날 학급 종례가 끝난 뒤, 나는 38년간 수재들을 모아 경남, 부산 일대의 초등학교 교원 양성의 요람을 이루어 온 유서 깊은 학교의 체취를 음미하고 싶어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도심에서 서쪽으로 비교적 한적하게 자리하고 있는 학교는 ‘신안벌’이라는 넓은 들 가운데 나직이 섰는 동산 하나를 곁에 끼고 있었다.

 

진주사범학교는 ‘경남공립사범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경남공립사범학교는 1920년 9월에 수업 연한 6개월의 경남 임시 교원 강습회 수료식을 행했다. 1923년 3월에는 임시 교원 양성소(1년제) 제2회 수료식을, 1927년 3월에는 강습과(1년제) 제4회 수료식을 행했다. 1926년 3월에는 2년제 특과 제2회 수료식을, 1931년 3월에는 마지막으로 3년제 특과 제6회 수료식을 행했다.

그리고는 1940년 3월 20일에 관립 ‘진주사범학교’가 창설되었다. 4월 6일에 학교의 위치를 진주부(晋州府) 신안리(新安里)에 두기로 하고, 도심의 남쪽 칠암리에 있는 진주농업학교에 가교사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4월 23일에 가교사에서 심상과 1학년 175명과 특설 강습과 116명으로 신입생 입학식을 열었다. 그리고는 2년 뒤 1942년 3월 28일 이곳 신안리(신안동) 건물로 이사하였다. 제1회 심상과 졸업식은 1945년 3월 22일에 있었으며, 1945년 10월 12일에는 광복을 맞은 진주사범학교로서 개교식을 했다.

우리나라에 초등학교 교원 양성 기관으로서 근대적인 성격의 사범학교는 1895년에 설립된 한성사범학교가 최초인데,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15개 사범학교가 있었다. 그 가운데 10개교가 남한에 있었다. 남한의 10개 사범학교 가운데 경성사범학교, 경성여자사범학교, 대구사범학교는 8.15 광복 직후 중등 교원 양성 기관인 사범 대학으로 승격했다. 공주사범학교, 광주사범학교, 대전사범학교, 전주사범학교, 진주사범학교, 청주사범학교, 춘천사범학교 등 7개 사범학교가 초등 교원 양성 기관으로 존재하였다.

그리고 진주사범학교는 1946년 부산사범학교가 개교하여 1949년 3월 첫 졸업자가 나오기까지는 부산을 포함한 경남 일대의 유일한 초등학교 교원 양성의 요람이었다.

 

학교의 가장자리는 측백나무를 비롯하여 온갖 나무들이 울타리 구실을 하고 있었다. 가시 철망도 쳐져 있었다. 자동차가 드나들 정도의 뒷문이 북쪽에 있었다. 뒷문은 두 나무기둥에 철사를 얽은 형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비스듬한 게 뒤로 넘어질 듯하면서도 힘 있게 버티고 있었다.

1949년 2월 26일 국군 제16연대 제2대대가 학교 기숙사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1949년 10월 27일 공산 유격대의 침입으로 기숙사의 부속 건물 한 채(식당, 주방, 목욕장, 보일러실 등으로 사용)가 불탔다. 이튿날은 학교 건물 전체를 국군에게 빌려 주고 학생들은 인사동 소재 진주중안국민학교 운동장에서, 강당에서, 혹은 야외에서 수업을 하였다.

1949년 12월 23일에는 육군 861부대가 주둔하다가, 1950년 1월 3일 학교를 떠났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7월 19일 국군에게 다시 건물을 빌려 주어야 했다. 학생들은 남성동 학교 관사 부근의 가교사 등에서 공부하다가, 1951년 6월 15일에야 모두 이 배움터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사와 운명을 함께 해 온 학교의 자취와 연관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학교 둘레에 오래된 철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았다.

 

전체 재학생이 650명 정도밖에 안 되는 학교치고는 면적이 퍽 넓었다. 운동장도 넓어 축구장 바깥 부분에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그리 많지 않은 탓인지 잡초들이 잔뜩 퍼져 있었다.

본관 뒤쪽 중앙에서 북쪽을 향해 걸으면서 화단과 밭을 지나면 오른편에 화학실, 생물실, 음악실 등이 있는 단층 목조 건물이 있었다. 음악실에는 대형 피아노와 다섯줄을 그린 칠판이 있는데, 내가 입학시험을 치를 때 음악 실기 시험을 본 곳이다. 계속 북쪽으로 걸으면서 보니, 왼편 밭에는 농작물이 자라고, 오른편에는 묘목장과 오래된 자갈과 풀섶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유리창도 문짝도 거의 없이 비바람에 시달린 흔적이 너무도 뚜렷한 긴 2층 목조 건물에 다다랐다. 이것이 지난날 기숙사 건물이었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무슨 기숙사인가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사범학교는 교육을 국가 백년 대계의 바탕으로 생각하면서 뛰어난 인재를 모아 국가 예산으로 특별 우대 속에 교육자의 자질을 닦도록 하는 교육 기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능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옛 기숙사 건물의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동쪽 아래층은 거의 폐쇄된 상태인데, 맨 끝 교실에는 매트가 깔려 있었다. 체격 좋은 두 학생이 유도복을 입고 서로 메치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위층에서는 오르간 소리가 교실마다에서 울려 나왔다. 남녀 학생들이 오르간 교본을 끼고 드나드는 걸로 보아 오르간 연습실임에 틀림없었다.

정면에서 보아 계단의 왼편(서쪽)은 각 층에 교실이 1개씩으로 있었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나중에 우리들은 거기를 공작실, 미술실 등으로 사용했다.

다시 옛 기숙사 건물을 끼고 동쪽으로 나오면 운동장이 된다. 운동장 북쪽에 기숙사와 거의 나란한 선에 보통 교실 1.5배 정도의 단칸 단층 목조 건물 하나가 외롭게 서 있었다. 그것의 본디 용도는 뚜렷이 알 수 없었지만, 서쪽으로 출입문이 나 있었다. 그 출입문 앞에 서서 교실을 들여다보면 나무 마루바닥이 있고, 맞은편 횟가루벽에 걸린 나무 그림틀에 오래된 태극기가 은은히 돋보였다.

황톳길이 뻔지레하고 나무들이 우뚝우뚝 섰는 본관 서쪽의 아담한 동산에도 올라 보았다. 본관 앞 강당을 경계로 따로 섰는 진주사범학교 병설 중학교도 다정하게 둘러보고 싶었지만, 나의 일터인 이발소의 일도 걱정되고, 또 3년이라는 세월이 그리 조급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기에 교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1948년 10월 21일 건립된 4개의 육중한 돌기둥이 섰는 정문에 이르니, 하동, 광주 등지에서 오는 단단한 시외버스가 자갈 깔린 한길을 날쌔게 달렸다. 사라지는 먼지 속에서 맞은편 가겟집에서는 긴 소주병과 과자가 든 유리그릇이 은은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나는 정문 앞 널찍한 공간 한가운데서 통로가 활짝 열린 정문을 되돌아보았다. 돌기둥에 ‘진주사범학교’라고 내리쓴 글씨를 보며 모자를 벗었다. 한자로 ‘師’(스승 사)자를 새긴 모표를 한참 어루만졌다.

이 배움터에서 나는 나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칠 스승의 길을 끊임없이 닦고 개척하게 될 것이다.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나의 가슴에 소중하게 간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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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월간 <한국국보문학> 2025년 6월호 87~98쪽(발행 도서출판 국보, 서울. 2025. 6. 1.)

 

■ 허만길

◉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 석사. 홍익대학교 문학박사(국어국문학). 시인. 소설가. 수필가. 문학평론가. 교육자. 1971년(28살) 복합문학(Complex Literature) 창시 및 세계 최초 장편복합문학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 발행(‘두산백과’ 등재). 17살 1960년 진주사범학교 학생회위원장으로서 진주의 4.19혁명 앞장.

◉ 국가시행 중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 수석합격으로 18살(1961) 최연소 중학교 국어과교원자격증 취득 및 고등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 수석합격으로 19살(1962) 최연소 고등학교 국어과교원자격증 취득('기네스북' 한국편 등재)

◉ 국어과 교사로서 1968년(24살)부터 서울 영등포여자고등학교 국어반 운영, 1974년(32살)부터 경복고등학교 우리말 사랑하기회 운영을 통해 우리말 사랑 운동을 전국 규모로 펼치고, 1975년 대통령 특별보좌관(철학박사 박종홍) 자문 등을 통해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국어 순화 운동을 국가적, 제도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데 이바지하였으며, 국어 사랑 이론을 정립하였음. 문교부 언어생활 연구위원(1971. 28살). 문교부 ‘장학 자료’ 제14호(학생 언어생활 순화 지도 지침) 집필(1972년 2월 발행). 문교부 ‘장학 자료’ 제26호(생활 용어 순화 자료) 집필(1977년 8월 발행)

◉ 1990년 <한글문학>에 최초의 정신대 문제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 발표(‘원주민촌의 축제’는 ‘두산백과’ 등재)

◉ 한국과 중국 사이에 국교가 없던 시기에 교육부 중앙교육연수원 장학사로서 교원국외연수단을 인솔하여, 1990년 6월 13일 대한민국 상하이임시정부 자리를 찾았으나, 아무 표적 없이 퇴색된 집에 중국 사람이 살고 있음을 보고, 현장 즉흥시 ‘대한민국 상하이임시정부 자리’를 읊고, 귀국 후 대한민국 광복 후 최초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리 보존운동을 펼쳐 그곳이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음.(시 ‘대한민국 상하이임시정부 자리’는 2010년 충남 보령시 주산면 ‘시인의 성지’에 시비로 건립됨)

◉ 환경 보호 운동 및 환경 교육 활동(1974~2005년)

◉ 일하며 배우는 전국 방송통신고등학교 학생(1974~2021년) 및 산업체 근무 학생(1985~1987년)을 위한 헌신적 노력

◉ 현대적 개념의 중⸱고등학교 진로 교육 정착 발전 활동(1993~2005년)

◉ 1991년 ‘정신대 위령의 날’ 제정 및 ‘국제 사람몸 존중의 날’ 제정 제의. 2024년 8월 13일 ‘국제 사람몸 존중 선언’ 선포(한국어/영어)

◉ 초⬝중⬝고교 교사. 문교부(교육부) 국어과 편수관. 교육부 국제교육진흥원 강사. 한국교육개발원 국어과 교과서 편찬연구위원. 한국교육과정평가원 해외동포용 ‘한국어’ 교재개발 연구위원. 학술원 국어연구소 표준어 사정위원. 서울대학교 국어교육연구소 ‘국어교육학사전’ 집필위원. 서울특별시교육연구원 진로교육연구부 연구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진로교육추진위원장. 한국진로교육학회 이사. 고등학교 교과서 ‘진로와 직업’ 편찬연구위원(발행 대한교과서주식회사, 서울. 2003). 서울 당곡고등학교 교장.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및 복지위원회 위원. 월간 한국국보문학 상임고문 및 편집고문. 한국신문예문학회 자문위원. 시인의 성지 현대문학기념 지도위원. 노태우 대통령 취임사 문장 검토(의뢰 기관: 대통령 취임 준비실시단. 1988. 2.)

◉ 저서

• 한국현대국어정책 연구(1994. 8. 25.)

• 음성언어교육의 영역설정 연구(1979. 8.)

• 우리말 사랑의 길을 열면서(2003. 5. 26.)

• 우리말 사랑의 길(1976. 6. 15.)

• 정신대 문제 제기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자리 보존운동 회고(2010. 12. 21.)

• (장편복합문학)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세계 최초 복합문학. 1980. 4. 26.)

• (시집) 당신이 비칩니다(2000. 12. 23.)

• (시집) 열다섯 살 푸른 맹세(2004. 11. 27.)

• (시집) 아침 강가에서(2014. 9. 1.)

• (시집) 역사 속에 인생 속에(2023. 7. 18.)

• (장편소설) 천사 요레나와의 사랑(1999. 12. 20.)

• (깨달음 글) 인류를 위한 참얻음(1980. 8. 21.)

• (수필집) 빛이 반짝이는 소리(1975. 10. 20.)

• (수필집) 열네 살 푸른 가슴(2007. 6. 4.)

• (수필집) 진리를 찾아 이상을 찾아(2007. 12. 21.)

• (수필집) 방송통신고등학교 학생과 졸업생에게 사랑을 보내며(2021. 11. 18.)

• (수필집-교육회고록) 저 푸른 별들에 제자들의 아픔과 소망이(2022. 9. 5.)

• (고등학교 교과서) 진로 상담(공동 집필, 서울특별시교육청, 1999. 1. 초판)

◉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1990). ‘꽃망울'(1991). ‘채색된 사람들'(1991). ‘충격'(1992). ‘진아 자매의 자굴산 축제'(2013). ‘선생님의 사랑’(2016). ‘노희의 자퇴’(2025)

◉ 작곡된 시

‘백두산 바라보며’, ‘우리 자연 우리 환경’, ‘악성 우륵 찬가’, ‘내 아내여서 행복이네’, ‘우정의 자리’, ‘여의도 꽃길’, ‘한강샛강다리’, ‘해운대 달밤’, ‘의령 아리랑’, ‘자굴산’, ‘진주 아리랑’, ‘진주 비봉산’, ‘방송통신고등학교 교가’ 등 약 30편

◉ 수상

황조근정훈장(2005), 대통령 표창(1991),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표창(2004. 정신대 문제 제기 활동), 상공부장관 표창(1987. 산업체근무 청소년교육공로), 한글학회이사장 표창(1988), 순수문학 작가상(2014), 문예춘추 청백문학상(2011. 작품의 청백정신 탁월) 수상.

◉ 허만길 시비

‘대한민국 상하이임시정부 자리’(충남 보령시 시인의 성지. 한국현대문학100주년기념탑 근처). ‘아침 강가에서’(충남 보령시 주산면 시인의 성지. 한국현대문학100주년기념탑 근처). ‘당신이 비칩니다’(충남 보령시 개화예술공원). ‘내 고향 칠곡’(경남 의령군 칠곡면 애향비 시문)

◉ 허만길 자료 타임캡슐 보관

충남 보령시 주산면 시인의 성지(시와 숲길 공원) 한국현대문학 100주년기념탑 옆 ‘한국문인인물자료 100년 보존 타임캡슐’에 허만길 인물 사진, 자필 시 ‘대한민국 상하이임시정부 자리’, 허만길 약력, 허만길 저서,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인쇄 지형, 순수문학 작가상 상패 사진 등 보관(2015년 4월 25일 봉인. 2115년 4월 25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