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

(허만길 수필) 1950년대 초등학교 학창 시절 기억(한국문학방송 앤솔러지 2017년 1월호)

별다홍 2023. 8. 19. 14:09

 

<수필>

1950년대 초등학교 학창 시절 기억

 

                                                                                          문학박사 허만길

 

나는 경상남도 의령군 칠곡면에 있는 칠곡초등학교 제30회 졸업자로서, 1955년 3월에 졸업했다. 우리 동기는 약 70명이 입학하여, 47명(남 38명. 여 9명)이 졸업했다.

1943년에 태어난 나는 세 살적(1946년)에 겨드랑이에 <천자문>(千字文) 책을 끼고 서당에서 허종수(1893-1952년) 선생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서당 입학 1년 뒤에는 <이천자문>(二千字文)을 공부했다. 또 그 다음해(1948년)에는 <통학경편>(通學徑編)을 공부했다. 한글보다 한자를 먼저 익혀 나간 셈이다.

1949년 4월, 네모진 종이에 깨알처럼 붙은 누에씨(누에알)에서 봄누에들이 까맣게 고물고물 막 나오기 시작하던 따스한 봄날, 어머니(노갑선 1908-1998년)와 누나(허맹준)와 여동생(허맹임)은 갓 나오는 누에들을 돌보고, 아버지(허찬도 1909-1968년)와 나는 면사무소를 거쳐 칠곡초등학교(*칠곡국민학교)에 가서 입학 등록을 했다.

운동장을 이리저리 걸으며 선생님이 “하나, 둘.” 하면, 학생들은 “셋, 넷.” 하였다. 맨 뒤에서 줄을 따라가던 나는 “셋, 넷.” 하면서도, 선생님이 학생들을 너무 어리게 취급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한테서 ‘토정비결‘(조선 명종 때 토정 이지함이 지은 예언서로서 1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책) 보는 법을 배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명절이면 친척들에게 ‘토정비결’을 보아 주었는데, 이것은 중학교 1학년(12살) 여름방학 때 외할아버지 노형용(1882~1958년) 선생에게서 역학(易學)을 배우고, 계속 전문가를 찾아 연구하여 대한풍수지리학회 이사(1991년)를 지내기도 한 것의 첫 주춧돌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1950년 7월)이었다. 조용하고 평화롭던 시골 아침 하늘에 비행기 한 대가 서쪽 망룡산 쪽에서 날아왔다. 비행기는 느닷없이 ‘따따따, 따따따 ···’ 하고, 기관총을 마구 쏘아댔다. 이것은 의령군에서는 처음으로 비행기에서 기관총을 쏘는 일이었다.

우리 집은 칠곡면 도산리 260번지에 있었는데, 도산마을의 맨 앞쪽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비행기 소리를 듣자마자 아래채 돌담 쪽으로 달려가 너른 들의 논 위를 이리저리 나직이 날며 기관총을 마구 쏘아대는 장면을 생생히 보았다. 도산마을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집에서 뛰쳐나왔다. 논두렁을 허우적거리며 앞산(안산) 골짜기로 몸을 피하고 있었다. 바로 머리 위에 뜬 비행기를 향해 담뱃대를 휘저으며 저리 가라는 시늉도 보였다. 비행기는 동남쪽 방갓산 쪽으로 사라졌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언제 또 비행기가 나타날지 몰랐다. 우리 가족은 논에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맨몸으로 앞산 골짜기로 몸을 피했다.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 솥에 안쳐 둔 보리밥을 바구니에 퍼서 생된장과 함께 가져왔다.

신문도 라디오도 없던 시골에 어느 누구도 무슨 영문인 줄을 몰랐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말이 퍼졌다. 그 다음날 진주에서 의령을 거쳐 대구, 마산, 부산으로 가자면 꼭 건너야 하는 칠곡면 해남다리가 두 번의 폭파 소리와 함께 내려앉았다. 뒤이어 70리(28km) 밖 남쪽 하늘에 진주가 불타는 연기가 시커멓게 솟았다.

나는 도산마을의 서쪽 산등성이 쟁기터를 지나 용동못(산남저수지) 가까운 산등성이까지 지게를 지고 땔나무를 하러 갔다. 산에서 내려다보니, 한길에는 서쪽의 의령군 대의면에서 동쪽의 의령읍 쪽으로 향하는 군인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군인 차들은 칠곡경찰지서 앞을 지날 때면 한결같이 호루라기를 세차게 불었다. 낙동강 쪽이나 부산 쪽으로 후퇴하는 국군 차량이었던 것이다.

모두들 동네를 비워 두고 산속에 굴을 파고 밤낮으로 귀를 찢는 비행기 소리와 폭격 소리를 들었다. 인민군들이 들이닥쳤다. 동네마다 많은 집들이 폭격으로 부서지거나 불탔다. 칠곡초등학교 건물도 폭격으로 불탔다. 다행히 새로 지은 우리 집은 안전했다.

우리 가족이 산골 압수마을에서 피란하고 있을 때였다. 추석(양력 9월 26일)을 지내고, 벼가 활짝 영근 어느 날 밤이었다. 밤새도록 칠곡초등학교쯤에서 쏘는 시뻘건 큰 대포알이 남쪽을 향해 높이 날았다. 대포소리는 ‘쾅’, ‘쌩’, ‘쿵’ 하는 세 박자 리듬을 탔다. 대포소리는 사람의 귀만을 찢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산을 온통 날카롭게 찢는 듯했다. 날이 새자 대포소리는 뚝 그쳤다. 한잠 못 잔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산골 동네에 꽉 찼던 인민군들이 보이지를 않는다고들 했다. 지난밤 대포 소리는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마지막으로 쏘아 대던 것이라고 추측했다.

칠곡초등학교의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는 엄청나게 커 보이는 두 대의 대포가 놓여 있었다. 도산마을 이웃 신촌마을 동사(洞舍. 마을회관)에는 부상과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인민군 포로들이 들것에 실려 들락날락 했다. 학생들은 학교에 볏짚 지붕 교실 여섯 채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학년별로 각 동네 넓은 집이나 빈터에서 공부했다.

가뭄이 연이어 들었다. 논두렁의 콩잎도 구하기가 힘들었다. 나도 배가 고파 콩잎 국물이라도 한 모금 더 먹고 싶었다. 사람들은 산에 올라 소나무껍질을 벗겨 먹었다. 끝내는 누렇게 부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국서 보낸 구호물자가 오면, 잔디 씨와 아카시아 씨를 모아 답례로 보내기도 했다.

입대한 장병들의 주검의 재를 담은 상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상자를 사람들은 ‘주검의 재 상자’라고들 했다. 주검의 재 상자가 돌아오면 면민들은 면사무소에 행사장을 차리고 추도식을 올렸다. 나는 5학년(1953년) 때부터 학생 대표로서 장렬하게 전사한 영령을 위해 추도문을 낭독하였다. 그때 나는 진심으로 죽음과 명복과 전쟁과 평화와 삶에 대해 엄숙하게 생각에 잠기었다.

인민군 정규군이 후퇴한 뒤에도 밤이면 산속에 숨어 있던 인민군(빨치산)들이 내려와 경찰과 싸웠다. 1953년 11월 23일 어른들과 의령군 대의면 부곡저수지 뒷산에서 시제(시사)를 지내고 칠곡면으로 막 들어와 어둠 속을 걷고 있을 때, 약 10km 떨어진 의령읍에서 큰불이 하늘로 치솟음을 보았다. 이튿날 학교에 가니, 국군복으로 갈아입은 인민군들이 차량을 빼앗아 타고 의령경찰서를 습격하여 의령경찰서가 불타고, 의령경찰서장이 순직했다는 말이 돌았다.

6학년(1954년) 때 학예회에서 ‘사육신’ 연극이 있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성삼문 역을 맡겼다. 성삼문 역은 나의 성격에 어울리고, 외워야 할 대사가 가장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학교에서는 나에게 전교 학생장(전교 자치회장)의 표시로 가슴에 천으로 만든 리본을 달고 다니도록 했다. 아버지는 나의 모습을 보고, 우월감으로 우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자주 강조했다.

1955년 3월 22일 나는 칠곡초등학교 제6학년을 졸업했다. 졸업식에서 학업 우등상, 개근상, 전교 학생장(자치회장)으로서의 공로상, 학업성적 우수 의령 교육감상(*‘교육감’은 뒷날 ‘교육장’으로 명칭 변경)을 받았다.

1955년 4월 나는 진주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로부터 나의 학업은 객지에서 엄청난 가난과 고난과 고학과 보람의 연속이었다. 때로는 비가 내리면 한잠 자지 못하고 방에 비가 떨어지는 하늘이 보이는 천장 없는 양철 지붕을 쳐다보며 물을 받아내야 했고, 학비를 제때 내지 못해 자주 서무실에 불리어 가곤 했다. 그래도 1958년 3월 중학교 졸업식에서는 고등학교 입학시험 교내 최종 모의고사 1등 학생에게 주는 ‘학업 장려상’을 비롯하여 학업 우등상, 도서위원장 공로상, 3년 개근상 등을 한 아름 받았다.

초등학교 교원양성 국립고등학교로서 수재들이 모인다는 진주사범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1960년) 때에는 학생위원회 위원장(학도호국단 운영위원장)으로서 진주시의 4.19 혁명을 이끌고, 최우수 성적(남자 2명. 여자 1명)으로 졸업하여 부산시내 교사 발령을 받았다. 진주사범학교 3학년 17살 때(1960년 9월) 국가 시행 중학교 교원자격검정고시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여 18살(1961년 4월 10일)에 중학교 국어과교원자격증을 받고, 이어서 국가 시행 고등학교 교원자격검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19살(1962년 12월 6일)에 고등학교 국어과교원자격증을 받았다.

한국기네스협회(코리아기네스협회) 사무국장 지영모 님을 비롯한 임원진은 나의 중학교 교원자격증 취득 및 고등학교 교원자격증 취득 각종 증빙서류를 갖추어, 1989년 4월 13일 영국 기네스본부(Guinness PLC)를 방문하여, 세계 기록 여부 심사 요청을 한 결과(*서울서 발행되는 ‘일간스포츠’ 1989년 4월 15일 11쪽에 보도), 영국 기네스본부에서는 세계 각국에 알아보면서 심사한 결과 나의 중학교 교원 자격증 취득(18살 20일) 및 고등학교 교원 자격증 취득(19살 8개월)이 세계 최연소 취득 기록임을 확인하고, 이 사실을 1989년 7월 2일 한국의 부산에서 개최된 제1회 영국 기네스본부 주관 한국진기록대회 때 영국 기네스본부에서 대회 참관인 자격으로 파견한 안나 니콜라스(Anna Nicholas) 님을 통해 알려 주었다. 나는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아 기네스본부 발행 <기네스북>(The Guinnes Book of Records)에는 이 두 기록이 실리지 않았으나, 1991년 2월 25일 한국의 서울에서 발행한 한국어판 <기네스북>(The Guinnes Book of Records. 발행 신아사, 서울. 1991. 2. 25.)의 <한국편>(302쪽)에는 내가 국내 최연소 중학교 교원자격증 취득자(18살. 1961년 4월 10일) 및 최연소 고등학교 교원자격증 취득자(19살. 1962년 12월 6일)임을 기록으로 실었다. 한국어판 <기네스북>(The Guinnes Book of Records)은 영국 기네스본부(Guinness PLC) 발행 <기네스북>(The Guinness Book of Records)의 한국어 번역본(번역자: 박영숙. 주한 영국대사관 수석 공보관)에 <한국편>을 첨가한 책이다. 이런 까닭으로 나의 이 두 사실은 세계 최연소 기록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국내 최연소 기록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

*출전: 전자책 《한국문학방송(DSB) 앤솔러지》 2017년 1월호 82-88쪽(발행 한국문학방송, 서울. 2017. 1. 15.)

 

◆ 허만길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 석사. 홍익대학교 문학박사(국어국문학). 시인. 소설가. 수필가. 문학평론가. 1971년 복합문학(Complex Literature) 창시(두산백과 등재). 17살 1960년 진주사범학교 학생회위원장으로서 진주의 4.19혁명 앞장. 국가시행 중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 수석합격으로 18살(1961) 최연소 중학교 국어과교원자격증 취득 및 고등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 수석합격으로 19살(1962) 최연소 고등학교 국어과교원자격증 취득('기네스북' 한국편 등재). 1990년 정신대 문제 최초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 발표(두산백과 등재). 1991년 ‘정신대 위령의 날’ 제정 및 ‘국제 사람몸 존중의 날’ 제정 제의. 1990년 대한민국 광복 후 최초로 아무 표적 없는 대한민국 상하이임시정부자리 보존운동 전개 성과. 2024년 8월 13일 ‘국제 사람몸 존중 선언’ 선포(한국어/영어). 문교부 국어과 편수관. 교육부 국제교육진흥원 강사. 한국교육개발원 국어과 교과서 편찬연구위원. 한국교육과정평가원 해외동포용 ‘한국어’ 교재개발 연구위원. 학술원 국어연구소 표준어 사정위원. 서울대학교 국어교육연구소 ‘국어교육학사전’ 집필위원. 서울 당곡고등학교 교장.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복지위원회 위원. 월간 국보문학 상임고문. ▲ 저서: ‘한국현대국어정책 연구’, ‘음성언어교육의 영역설정 연구’, ‘우리말 사랑의 길’, ‘우리말 사랑의 길을 열면서’, ‘정신대문제 제기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자리 보존운동 회고’, 문학사상 최초 장편복합문학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 장편소설 ‘천사 요레나와의 사랑’, 시집 '아침 강가에서', ‘역사 속에 인생 속에’, 수필집 '열네 살 푸른 가슴', '진리를 찾아 이상을 찾아', '방송통신고등학교 학생과 졸업생에게 사랑을 보내며', ‘저 푸른 별들에 제자들의 아픔과 소망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