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만길 시) 밤에 밤을 만나지만
밤에 밤을 만나지만
시인 허만길
밤은 낮에 만날 수 없다.
밤을 만나려면 밤 속에 들어가야 한다.
밤에 밤을 만나기 위해
밤을 기다리고 밤 속을 헤맨다.
밤의 눈, 코, 입을 만나고 싶고
밤의 배, 팔, 다리를 만나고 싶고
밤의 심장, 마음, 언어를 만나고 싶다.
밤을 그렇게 만나고 싶어도
그 밤을 제대로 만날 수가 없다.
밤을 만났다면 그것은
밤의 허울이나 컴컴한 겉옷 같은 것이었다.
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밤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밤이 무엇을 듣는지도
알 수가 없다.
밤은 밤이면 늘 내 곁에 와 있지만
밤을 알 수 있는 방법조차 안 보인다.
밤은 나에게 휴식을 주기도 하고
밤은 나에게 잠 못 이루는
괴로움을 주기도 한다.
밤은 밤이면 나에게 와 있으면서도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내 손에, 내 마음에 잡히지를 않아
그 또한 나에게 고통을 준다.
밤이 진정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면
나는 밤과 단 둘이 누워
나의 이야기, 너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밤이다.
도대체 밤은 제대로 알 수 없기에
그래서 그것이 밤인가 보다.
밤을 알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밤이 아닌 것이 밤인가 보다.
밤에 밤을 만나지만
알 수 없는 것이 밤이다.
밤은 밤만이 밤이 아니다.
너도 밤일 수 있고 나도 밤일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이 밤일 수 있다.
그래도 나는 밤의 더욱 뚜렷한 참모습을
만나고자 할 것이다.
알 수 없는 밤이지만
밤 또한 나의 참모습을 알고 싶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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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월간 한국국보문학 2018년 6월호 (도서출판 국보, 서울)